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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뜨거운 마음

3월 22일  뜨거운 마음

눅 24: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는 마음을 뜨겁게 하는 비결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갑자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불이 붙게 되고 우리는 멋진 비전을 갖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이 뜨거운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타오르게 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비결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루하고 따분하며 재미없는 단조로운 일생 생활과 매일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뜨거운 마음을 차갑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많은 번민은 죄 때문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속성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감정에 따르는 것을 허락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판단 기준은 그 감정으로 인하여 야기될 결과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십시오. 만일 그 결과가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라면 절대로 그 감정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한편 성령에 의하여 감정이 뜨거워졌을 경우 만일 그 감정을 우리의 삶 가운데 적절히 표현하지 못할 경우 그 뜨거운 감정은 아주 낮은 차원에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감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감정이 적절한 수준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감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 추락도 매우 깊고 상처도 심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요동한다면 가능한 많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 상에서 계속 거할 수 없습니다. 그 곳에서 받은 빛에 따라 현실 가운데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비전에 맞는 일들을 하십시오.

 

우리는 태우고 싶어도 태울 수 없네. 우리 마음 속에 거하는 그 불.

성령이 숨을 쉬면 고요하지만 나의 영혼은 신비에 거하게 되네.

매 시간마다 일마다 깨달음을 주셔서 어두움의 시간이 다 마쳐지네.

by oswaldchambers | 2009/03/21 19:42 | 최상의 주님께 | 트랙백 | 덧글(0)
3월 21일 관심입니까 아니면 일치입니까?

3월 21일  관심입니까 아니면 일치입니까?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영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죄성의 사망 증서에 인을 치는 것입니다. 이는 감정적인 표현과 지적인 믿음을 다 동원하여 죄성 곧 내 자신에 나의 권리 주장에 대하여 나는 죽었다고 전인격적(moral, 도덕적)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로 작정하였다거나 또는 나는 그 분을 따르기를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울은 나는 주의 죽으심과 함께 주님과 일치되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전인격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행하면,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기꺼이 내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내게 부여(impart)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사람의 개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마음을 다스리던 성향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 사람의 몸은 여전히 같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과거의 사탄적 주장은 제거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내가 원하는 삶도 아니고 기도를 통하여 소원하던 삶도 아닙니다. 지금 이 죽을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삶으로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삶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소유하셨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모든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셨던 바로 그 믿음입니다.

 

by oswaldchambers | 2009/03/20 20:18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0)
3월 20일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

3월 20일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

창 18: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주님과 친구 관계의 기쁨.
창세기 18장은 가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정말로 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믿음의 삶의 훈련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에 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러한 온전한 관계가 맺혀지면 우리의 삶은 자유함과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찹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 되며, 우리가 상식적으로 내리는 결정들이 만일 하나님께서 특별히 막지 않으신다면 보통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기쁘고 완벽한 친분 안에서 삶을 결정하여 나갑니다. 만일 우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주께서 언제나 막으실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막으시면 당장 멈춥니다.

 

주님과 친구 관계의 어려움
왜 아브라함은 기도를 멈추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까지 담대히 나갈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분히 깊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역자 주 -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만큼 친밀하다면 그의 기도는 곧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이므로 끝까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유는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짧게 멈추고,
글쎄. 잘 모르겠어요. 아마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여전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나아가야 할 다른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귐같이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만큼 아직 하나님과 가깝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당신이 마지막으로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나요? 성령의 몇가지 은사를 구하기로 결정하셨나요 아니면 성령을 구하셨나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알 수 있기 위하여 계속 기도하십시오. 

by oswaldchambers | 2009/03/19 20:17 | 최상의 주님께 | 트랙백 | 덧글(0)
3월 19일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

3월 19일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

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구약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라 함은 따로 분리됨을 의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는 그의 친척과 고향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구별됨은 위치적인 개념보다 정신적, 도덕적인 면에서 고려되어집니다. 즉, 만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자들일 경우 우리는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더욱 강조하셨습니다 (참조, 눅 14:26).

믿음은 자신이 어디로 이끌리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끄시는 그 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지성이나 이성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그 분을 알아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뿌리는 그 분을 아는 (경험적, 인격적) 지식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함정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는 성품의 완성입니다. 성품을 변화시키는 많은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것은 평범한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기도하는 시간에는 변화된 것 같은 축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변화된 느낌을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삶과 나날로 돌아가게 되면 그 영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지 않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날개를 펼쳐 저 높은 곳에 단숨에 날아 오르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 한 걸음씩 계속 걸으며 나아가는 삶이지만 지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믿음의 삶은 오직 개인의 성화뿐만 아니라 훨씬 더 무한히 높은 차원의 역사들을 일으킵니다. 참 믿음은 시련을 당할 때 증명되며 마침내 시험을 이기고 일어섭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성화의 표준이 아니라 믿음의 삶의 표준입니다. 그는 모든 시험을 이기고 참된 하나님 위에 참된 믿음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라.

by oswaldchambers | 2009/03/18 20:39 | 최상의 주님께 | 트랙백 | 덧글(0)
3월 18일 이러한 분량까지 내 자신을 일으켜 세웁니까?

3월 18일  이러한 분량까지 내 자신을 일으켜 세웁니까?

고후 7: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정당하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청은 사람 편에서만 고려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빛을 자명히 드러내는 그러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화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의 할 일은 주님을 향한 순종을 통하여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소한 일까지 간섭하시며 교훈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실 때는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고 당장 자신을 정결케 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

나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까지 영과 육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부터 내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합니다. 당신의 영과 마음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온전히 일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식을 내세워 불순종합니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형성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을 주의 성령과 온전히 일치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 삶은 다른 그 어떠한 것에도 전혀 마음을 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드려진 삶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이러한 종류의 거룩을 완성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주의 길을 내시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점점 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다른 나머지 것들은 사소하게 보십시오. 정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by oswaldchambers | 2009/03/18 20:39 | 최상의 주님께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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